보수적 사랑의 확인과 회상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나서
김사열(경북대 교수)
이용주가 감독한 멜로영화 <건축학개론>은 2012년 3월 22일에 개봉되었다. <건축학개론>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띤 보편적 사랑의 가치를 무난하게 담아내었다. 이 영화는 대중성이 높아서 누적관객 수 약 410만 명을 기록하여 2012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4위, 역대 한국멜로영화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학개론>은 20세기 말엽을 청춘의 시기로 보낸 이들에게 보낸 추억과 현재의 존재 확인을 요구하며 아쉬움과 쓸쓸함과 안도감을 선사한 영화로 해석된다.
대학 입학 후,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과거역할 수지)과 건축공학도 승민(과거역할 이제훈)은 서로 교감하여 첫사랑의 소중한 불씨를 키워간다. 그러다가 중간에 예기치 않은 일로 그 사랑은 탈이 나서 불씨가 꺼지고 만다. 첫눈 오는 날 빈집에서 만나자던 약속은 아슬아슬하게 지켜지지만 만남이 없는 사랑이 되고 만다. 15년이 흐른 뒤 30대 중반 나이에 서연(현재역할 한가인)은 고객이 되어 건축회사에 다니던 승민(현재역할 엄태웅)을 찾아오면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확인 작업이 시작된다.
인간사 모든 길은 기억으로 통하는데, 문화적 기억 연구전문가인 알라이다 아스만의 해석대로 ‘그 중 한 길은 기술(ars)이란 길이고, 다른 길은 활력(vis)이라는 길이다.’ ‘기억의 저장과 인출이 정확하게 일치해야 하는’ 기억술과 달리, 영화 스토리는 주인공 각자에게 ‘차이가 일어나게’ 되는 회상의 방식을 쫓는다. 그래서 일그러진 사랑은 회복될 수 없었고, 단지 일그러짐과 거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종료되고 만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키워드를 대체로 ‘첫사랑’과 ‘건축’으로 꼽고 있지만, 평자는 ‘사랑의 가치’를 추가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두 남녀 주인공에게 부모와의 관계가 동시에 다뤄지고 있어서 남녀 간의 사랑에서 좀 더 보편적인 사랑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로 승민은 여성과 만나 모친을 떠나 외국으로 가고, 서연은 남자와 관계를 정리하고 죽어가는 부친을 위하여 중요한 것들을 집중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미숙할 수밖에 없는 첫사랑은 타올랐던 불씨를 살려가지 못하고 소위 ‘찌질하게’ 마무리하게 만든다. 동물사회학의 일반적 통념대로, 서연은 다원적 남녀관계로 줄다리기를 하고, 승민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타까운 패배의 수를 두고 만다. 제대로 된 프러포즈나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승민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포기하는 장면은 사랑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되묻게 해 주고 있다.
이 장면에 대한 안타까움은 2군데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홀로 이별을 결정한 후, 승민이가 친구 납뜩이(조정석 역)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음마~ ㅂ신, 뭘 한 게 있어야 그만 하지!” 별도로, 훗날 서연이가 승민이를 다시 만났을 때, 술에 취한 상태를 빌어 서연이가 다음과 같이 외친다. “개ㅅ끼 - - - 아 ㅆ발 다 X같애 - - -”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 일방적 사랑은 그렇게 고통을 남겨두고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안긴다. 제멋대로 저장된 기억의 공간은 닫혀져서 활력을 찾지 못하고 아쉬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현재에 대한 합리화를 정당화하는 근거로서의 기억일 뿐이다. 그래서 아쉽고 쓸쓸하지만, 안도감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그런 입장에서 <건축학개론>은 도발적 활력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 사랑의 전형을 보여 준 셈이다.
118분 상영시간 동안 영화의 여기저기에 지금은 보기 어려운 씨디 플레이어, 삐삐 통신수단, 무쓰 등과 같은 90년대 청춘문화가 배치되었다. 배경음악도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것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예를 들자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등이 바로 그것이다. 거리의 풍경이나 의상도 영화의 분위기에 맞게 그 당시의 모습으로 적절히 재현되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섬세하고 탄탄해 보이는 시나리오를 근간으로 하여 남녀 주인공에 대한 2인 1역의 캐스팅이 돋보였다. 서연 역할의 수지와 한가인은 연결이 잘 된 편이지만, 승민 역할의 이제훈과 엄태웅은 연결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랐다. 한편, 납뜩이역 조정석은 해당 역할에 맞는 발군의 연기를 선보여 크게 도드라졌다.
‘사랑하기’와 ‘집짓기’라는 소제를 가진 영화 ‘건축학개론’. 고객 서연의 요청으로 승민은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집을 짓게 되지만, 아쉽게도 집의 완성 후에 식구가 되지 못하고 타자의 길로 떠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과거 기억의 공간이 해체되지 않는 문화적 기억의 한계를 잘 보여 준 셈이다. 한편, 이 영화는 향후 멜로가 한국 영화의 대중적 장르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도록 소중한 역할을 해 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