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과속 스캔들>로 830만 관객을 모은 강형철 감독의 <써니>가 흥행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19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4일 개봉한 <써니>는 개봉 15일 만에 202만 9613명(누적 관객수)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로써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위험한 상견례>에 이어 올해 세 번째 200만 관객 돌파작품이 됐다.
평일 오전에 시작하는 조조할인 영화관의 객석도 절반 가까이 채워지고 있음은 심상찮은 조짐이다. 무엇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고 있을까. 왜 그들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영화 <써니>를 돌아보자.
아련한 향수와 절절한 추억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 물론 그 시절은 사람마다 다르다. <써니>는 그것을 고교시절로 설정한다. 영화에 나타난 시간대는 1985년과 2010년 두 시기다. 그래서 객석은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엄마와 아버지는 영화가 인도하는 대로 시간여행을 함으로써 아련한 향수에 젖어든다. 교복, 체벌, 규율, 폭력...
아들과 딸은 그런 엄마와 아버지를 보고 오늘의 그들을 돌이켜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25년 뒤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영화관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를. 그래서다. <써니>가 거친 욕설과 만만찮은 폭력성으로 15세 관람가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을 대동한 부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객석을 점령하고 있는 까닭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음악, 예컨대 나미의 <빙글빙글>과 조덕배의 <꿈에>가 흐른다. 그뿐인가. 리처드 앤더슨의 <리얼리티>와 3인조 그룹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지금 세대야 알 리 없지만, 80년대를 호흡했던 중년 관객들은 아련하다 못해 절절한 지난날의 추억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세시봉>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터.
딸과 아들은 아주 흐뭇하고 신기하게 엄마와 아버지를 바라본다. 노래방에 함께 가도 세대차이 때문에 흥이 나지 않았는데, 영화관에서 자기네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는 부모님이 새삼 대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 데리고 영화관에 오면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지.
웃음이 넘치는 객석
검정색 상복으로 무장한 다섯 명의 중년 여성들이 영정과 화환을 앞에 두고 춤사위에 골몰하고 있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는 그들은 '써니' 멤버들이다. 진덕여고를 대표하는 불량서클을 주도했던 '짱' 춘화가 암 때문에 세상을 뜬 병원 영안실에서 그녀를 추종하던 다섯 사람이 한데 어울려 흐드러지게 춤판을 벌리고 있다.
아니,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뭐가 신이 나서 그들은 저토록 흥겹고 명랑한 것일까. <써니>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던 엄숙한 죽음과 무거운 작별과 작별한다. 그래서 장례식 장면에서까지 객석에는 흐드러진 웃음이 넘쳐난다. 슬프고 우울하며 칙칙한 영안실이 아니라, 모두가 환하게 웃고 서로를 축복하는 기쁨과 환희의 장면이 탄생하는 것이다.
<써니>에는 이런 장면들이 흐르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터진다. 심각한 장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는 나미의 오빠 종기 때문에 온가족이 풀이 죽어 있을 때에도 욕쟁이 할머니의 거친 육담은 멈추는 법이 없다. 경찰마저 놀려대는 할머니의 용기와 배포(?)가 객석을 환하게 밝힌다.
지나간 시절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안타까우며 기막힌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아련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써니>는 관객의 그런 심성을 정통으로 찌른다.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어차피 그것은 지나간 먼 옛날의 일일 뿐. 그리하여 우리는 따뜻한 웃음과 잔잔한 미소로 그것을 떠올리고 추억하며 헤어지는 것이다.
눈물짓고 한숨 쉬는 관객
'써니'의 일곱 멤버들은 제각각 고유한 얼굴과 옷차림과 표정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누구 하나 다른 사람과 닮지 않았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객석은 그들 하나하나에서 자기와 닮거나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물을 찾아내느라 골몰한다. 나이든 '써니들'이나 어린 '써니들'이나 이것은 모든 관객들에게 다 같이 적용 가능하다.
그윽하고 은은하며 도도하고 신비스러운 까만 생머리의 '수지'와 벌교에서 수재로 날렸던 '나미'가 포장집에서 소주를 앞에 두고 혀가 꼬부라져간다. 열여덟 살 고2로 하여금 25도짜리 '카바이트' 독주를 마시도록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같은 '서니'의 멤버이면서도 화합하지 못한 채 기름과 물처럼 겉돌던 그들이 하나가 되는 비결은 또 무엇인가.
<써니>에서 내가 잠시 울 뻔했던 장면은 여기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서로를 이해해 보려고 마음을 여는 풋풋한 심성의 어린 처녀애들의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 먹지도 못하는 술을 단박에 마셔가면서 속내를 풀어놓는 그들의 행태에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저토록 서로를 그리워하고 다가서려는 간절함이 넘쳤던 80년대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이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부둥켜안은 채 마침내 하나가 되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 인상 깊은 것이었다. (조금 짧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렇게 친구에게 다가서려는 애절한 마음과 그것을 인내하고 들어주고 끝내는 마음을 열어가는 80년대 소녀들에게 느껴지는 짙은 인간적인 감정이 그렇게 살갑고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폭력의 80년대와 명품의 21세기
'써니' 멤버들은 1984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여고생들이다. 영화의 배경은 그 이듬해인 1985년. 그러니까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민주적인 독재가 기세 높은 줄 모르고 하늘을 찌르던 시기다. 광주항쟁을 폭력으로 압살하고 권력을 쟁취한 전두환ㆍ노태우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그런 시기. 까딱 잘못하면 바로 감옥으로 직행했던 암흑의 시간대.
대학가에는 '삼민투(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가 주도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이 뜨거웠다. 그것의 절정이 1985년 5월에 있은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이다. <써니>에서는 학생들의 열화 같은 시위와 전경들의 강경진압이 <터치 바이 터치>의 경쾌한 음악과 율동적인 동작이 하나가 되어 무겁지 않게 처리된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써니' 패거리와 '소녀시대'의 맞대결이 교차됨으로써 긴장보다는 흥미를 더한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폭력의 순환과 대물림을 나직하게 속삭인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았던 무한폭력의 변주시대 1980년대. 그런 시대의 상흔이 여전히 우리 세대의 기억과 혈관에 남아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딸 예빈이 친구들에게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나미가 예빈 친구에게 날리는 명품 백에서 드러난다.
40대 초반 중년 여성들이 한데 모여서 딸년 친구들과 한바탕 싸움판을 벌인다는 발상!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써니>는 이 지점에서 객석을 포복절도의 마당으로 만들어 버린다. 애들이 먼저 시비 거는 것도 아닌데, 아줌마들이 선방을 날리는 저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라니. 더욱이 나미가 휘두른 명품 백이 가져온 한 방의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글을 마치면서
모름지기 희극에는 사회상과 인간과 일상이 담겨있는 법이다. 비극은 개인적인지만, 희극은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오셀로>에서 사랑의 슬픔이나 질투의 허망함을 읽을 수는 있지만, 세상과 역사는 거기 없다. 하지만 <봉숭아학당>이나 <개그콘서트>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에 대한 적잖은 비판과 풍자 혹은 사회상을 독서한다.
<써니>는 그런 점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감독은 장르를 '희극과 드라마'로 규정한다. 웃음을 동반한 사회 성찰 드라마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웃음을 전면에 부설하되, 그것의 배후를 세상과 사람에 주안점을 두어서 사유하는 드라마의 요소를 유지하겠다는 속셈인 게다. 영화에서 우리는 웃음 뒤에 자리한 숱한 삶의 문제를 본다.
사투리 때문에 괴로운 나미, 새엄마와 소통하지 못하는 수지, '써니' 멤버가 되지 못하고 왕따 당해 본드 걸로 전락하는 상미. 이런 작은 문제뿐 아니라, 암투병과 죽음, 사랑과 영혼이 결석한 가정, 술집작부로 전락하는 멤버까지, 무거운 문제도 많다. <써니>는 그래도 밝고 투명하며 발랄하다. 거기에는 삶의 어둠과 한숨과 슬픔을 날려버리는 강력하고 환한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관객은 <써니>를 보러 가는지 모른다.